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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우리가 사는 세상을 더 낫게 만들려고 싸우는 거야”

원천:3377TV   출시 시간:2024-09-11
동그란의 마음극장 ‘추억(The way we were)’영화 ‘추억(The way we were)’의 한 장면. 컬럼비아 트라이스타 픽처스 제공
요즘 인공지능(AI)이 그렇게 능력이 좋다기에 구글 제미니에게 물어봤습니다. “‘동그란의 마음극장’ 이번 호는 무슨 영화를 이야기하면 좋을까?” 그랬더니 즉각 답하기를 “가을이 다가오니 추억이 있는 영화를 다루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 신속한 대답에 감탄하며 ‘가을’과 ‘추억’이라는 키워드에 힘입어 떠올린 영화는 로버트 레드포드와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주연의 ‘추억(The way we were)’(시드니 폴락 감독, 1974)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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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가을이면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자주 틀어줘서 노래로 먼저 알게 됐었어요. 갈색 낙엽이 바람에 날리는 풍경을 연상하게 하는 이 음악이 영화 주제가라는 걸 알고 영화를 찾아본 것도 아주 오래전의 일이에요. 1940년대 미국 대학과 1950년대 할리우드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는 점이 흥미를 끄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쉴 새 없이 아르바이트하는 고학생으로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아 열혈 운동권이기도 한 케이티. 별로 노력하지 않는데도 글쓰기 등 재능이 많은 데다 잘생긴 외모로 눈길을 끄는 허블. 두 사람은 성향이 아주 다르고 캠퍼스 안에서 접점이 많지도 않았지만 서로에 대해 깊은 인상을 간직하고 있었어요. 허블에겐 없는 신념과 열정이 케이티에겐 넘쳤고, 케이티에게 없는 여유로움과 풍요로움은 허블을 감싸고 있는 공기였죠. 졸업 후 해군 장교가 된 허블과 라디오 프로듀서가 된 케이티가 어느 파티장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 그들은 서로를 단번에 알아보았죠. 그날의 우연을 케이티는 운명으로 만들려고 노력해요. 허블과 함께하기 위해서라면 반전운동이나 직업 같은 건 다 버려도 좋을 것 같았어요.

‘추억(The way we were)’의 한 장면. 컬럼비아 트라이스타 픽처스 제공
허블에겐 대학 시절부터 붙어 다니던 여자친구가 있었죠. 그런데도 자꾸만 케이티를 찾아가게 되는 이유를 그 자신도 잘 모르는 것 같더군요. 예전엔 허블이 워낙 바람둥이라서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너무도 확실한 이유가 있었더라고요. 케이티는 허블의 재능을 기억해주고 일깨워주는 사람이었어요. “자기는 책을 써야 해! 확실해!” 그 말이 듣기 좋았던 거예요. 그런데 허블은 새 책 쓰는 일은 뒷전이고 예전에 썼던 책을 시나리오로 만들어 할리우드로 진출하지요. “넌 할리우드엔 아까워!” “누가 사주기나 하면 좋겠거든!” 허블은 케이티와 함께 할리우드로 가고 싶지만 한편으론 겁이 났죠. “우린 오래 가지 못할 것 같아. 넌 싸울 준비만 되어 있지 이해할 준비는 전혀 되어 있지 않아.” 그녀와 함께하는 생활은 도무지 엄두가 안 나고 두려웠죠. 하지만 이 어울리지 않는 커플은 젊었어요. 그를 사랑하고 그녀에게 사랑받는 걸 포기할 수 없었죠. 모든 걸 다 잃는다 해도 서로를 포기할 수 없었던, 어떤 시절이 이 영화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어요. 뭔가 찜찜하지만 눈과 귀를 막고 함께하기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어리석지만 뜨거운 어떤 시절 말이죠. 당신에게도 그런 날들이 있지 않았나요, 하고 속삭이는 것 같아요.

떠나기로 단단히 마음먹은 허블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케이티에게서 언젠가의 나를 보았죠. 하지만 어차피 허블은 붙잡히고 싶어서 찾아온 거예요. 그게 아니라면 케이티의 눈물 어린 호소를 밤새 듣고 서 있을 리가 없죠. 그러나 케이티는 허블이 품기엔 버거운 사람이고 허블도 그걸 잘 알죠. “케이티, 넌 기대가 너무 커.” “그건 너이기 때문이야.”

케이티를 버릴 수도 없고 가질 수도 없는 허블의, 그 미칠 듯 답답했을 심경이 예전엔 잘 안 보였는데, 제는 선명하게 보이더라고요. 언젠가 파국이 올 것이지만 그게 지금 당장은 아니니까, 허블은 체념하듯 케이티와 함께하는 삶으로 나아가죠. 그리고 예정된 시간이 오고야 오고야 맙니다. 할리우드의 화려한 사교생활에 적응하며 주부로 잘사는가 싶던 케이티를 세상이 그냥 두지 않았죠. 매카시즘과 검열이 짓누르는 영화 제작의 현장에서 곤란을 겪는 건 허블이었는데, 그 보이지 않는 적들과 싸우러 나서는 건 케이티였어요. “이 집의 아내는 워싱턴DC로 가려고 하는군. 아이도 데려갈 건가?” “당신도 같이 가지그래.” “같이 집에 있는 건 어때?” “그럴 수 없어.”

케이티가 임신한 몸으로 언론과 예술의 자유를 부르짖으러 떠난 사이, 집에 남은 허블은 무얼 했을까요? 친구들과 어울려 와인을 마시며 대학 시절의 모습이 담긴 필름을 돌려보더군요. 옛 시절의 영상을 바라보는 허블의 눈에 이별이란 두 글자가 쓰여 있는 듯했어요. ‘참 좋았던 시간’이었다고 아련한 눈빛으로 말하는데 그건 곧 케이티를 떠나보낼 때가 왔다는 뜻이었죠. 케이티는 세상의 모순을 밝히고 불의에 맞서 싸울 때 생기가 돋는 사람이죠. 그에 비하면 허블은 주어진 삶을 잔잔하게 음미하려는 사람이고요. 한때는 어떻게든 서로의 방식을 포개어 함께 살아갈 수도 있을 거라 여겼지만, 전부터 예감했듯 영원할 수는 없었던 겁니다.

물론 허블은 그 대가를 치러야 했어요. 영화의 완성을 미심쩍어하는 제작자 앞에서 대본을 고치겠다고 애걸하다시피 했죠. 아내는 남편의 작품을 지키기 위해 투쟁에 나섰는데, 남편은 스스로 자본과 권력 앞에 몸을 굽히고 있다니 참 어이없는 상황이죠? 허블로선 케이티의 신념을 배신함으로써 그녀 곁에 머물 자격을 스스로 박탈해야 했던, 정말이지 쉽지 않은 이별의 절차였습니다. 허블이 제 손으로 망쳐놓은 영화를 보고 케이티는 몹시 괴로워해요. 허블은 그런 케이티를 꼬옥 안아주고요. 이제 완전히 끝난 거죠.

책을 쓰라고 말해주는 그녀가 좋았고, 그가 쓰는 글을 열심히 읽어주는 그녀가 사랑스러웠고, 그를 위해 파리 유학을 준비하는 그녀도 든든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 모든 게 견딜 수 없이 싫어진 까닭은 무엇일까요?

컬럼비아 트라이스타 픽처스 제공
이 영화를 처음 보았던 삼십대 초반의 나는 허블을 책임감 없는 나쁜 남자라고 욕했어요. 그런 남자와의 시간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는 케이티도 이해할 수 없었죠. 하지만 지금의 나는 자기 방식을 고집하는 그녀 곁에서 지쳐버린 허블의 편에 서 있어요. 그녀가 그녀 방식대로 살아갈 수 있게 물러나주기 위해 무얼 감내해야 했는지도 알아요. 무엇이 옳은가를 가려내고 판단하여 자신이 믿는 대로 행하는 사람에게 이끌리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어요. 그런 사람에게서 감지되는 위험조차 치명적인 매력으로 느꼈다니까요.

하지만 그런 사람과의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어요. 그 사람이 존재하는 방식이 부담돼서 점차 거리를 두게 되었고 마침내는 한계에 달해 완전히 돌아서는 순간이 왔죠. 싸우는 방식으로 살면 계속 싸울 일이 생기고 불평하는 사람에겐 계속 불평할 일이 생겨요. 원칙과 신념을 지키는 태도는 훌륭하지만 타인에게 같은 걸 강요해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방향을 틀며 살아가는 유연함이 비난받을 이유도 없다고 생각해요. 긴 인생을 걸어가는 발걸음을 무겁게 만드는 어떤 패턴이 나와 맞지 않다면 단호하게 끊어줄 필요가 있지요. 언젠가는 이별의 절차를 혹독하게 치를 것을 알기에 누군가를 내 삶에 받아들이는 일이 어렵게 되었다는 게 몹시 씁쓸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안도감이 느껴지기도 해요.

한때는 케이티가 좋았지만 계속 함께하기는 어려워 고통스럽게 돌아서는 허블을 이해하는 내가 되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했네요. 함께했던 시절을 아름답게 추억할 수 있는 것은 이미 돌아올 수 없을 만큼 서로의 길이 멀어졌기 때문이라는 이 이야기의 결말도 이제는 이해가 돼요. 마찬가지로 어느 날 갑자기 내게서 등을 돌리고 멀리 가버린 이들을 내가 용서했다는 것을 깨달아요. 그들이 그 시절 나의 무엇이 못 견디게 싫어서 떠났는지 헤아려보는 일이 별로 괴롭지 않아요. 잠시나마 서로의 시간을 포갰던 기억을 잘 간직하려고 헤어진 거라고 생각하면 아픈 이별도 추억이 돼요. 충분히 사랑했기에 좋은 이별을 할 수 있다는 말을 이제는 믿어요. ‘경험을 통해 깔끔하게 물러나는 법을 배웠다’는 케이티의 마지막 말이 지금 내 마음을 비춰주는 것 같아요.

영화 칼럼니스트 이하영 ha0282@naver.com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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