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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진 “대한민국서 이 나이에 춤추고 다리 떠는 놈 봤냐”

원천:3377TV   출시 시간:2024-09-09
[창·작·가] 다큐 영화 ‘오빠, 남진’ 개봉남진은 콘서트 영화 ‘오빠, 남진’에서 대표곡 무대를 선보이며 지난 60년의 가수 생활을 되돌아본다. 최근 국민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그는 “인생도, 인기도 파도 같다”며 “노래할 수 있을 때까지 하고 ‘노래가 안 돼서 떠난다’는 말을 듣기 전에 은퇴하고 싶다”고 밝혔다. 바보들 제공
“당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가 없었다면 쓰라린 이별만은 없었을 것을. 해 저문 부두에서 떠나가는 연락선을 가슴 아프게 가슴 아프게 바라보지 않았으리. 갈매기도 내 마음같이 목메여 운다.”

1967년 발매된 ‘가슴 아프게’는 남진의 대표곡이다. 멀리 떠난 사랑하는 이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은 이 노래는 재일동포들이 고국을 오가는 일이 자유롭지 않았던 시절, 바다를 사이에 두고 헤어져서 살아야만 했던 많은 사람의 가슴을 울리며 큰 인기를 얻었다.

그보다 2년 앞서 발표된 남진의 데뷔곡 ‘서울 플레이보이’는 제목만으로도 파격이었다. 1930년대 ‘모던 보이’ ‘모던 걸’이 있었다면 1960년대엔 ‘플레이보이’가 있었다. 신인류, 신세대를 뜻하는 말이었다. 트로트와는 결이 다른 팝 음악이라는 점도 눈길을 끌었다.

데뷔 60주년을 맞이한 가수 남진의 콘서트 무비 ‘오빠, 남진’이 지난 4일 베일을 벗었다. 영화 개봉을 맞아 최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남진은 “가요 프로그램 사회자들이 ‘황태자’ ‘황제’ 이렇게 소개하는데 난 ‘오빠’가 좋다”며 “나이를 여든이나 먹었는데 그렇게 불러주니 얼마나 기분이 좋은가. 감사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했다.

‘오빠, 남진’은 우리나라 가요계에서 처음으로 ‘오빠’라고 불린 그의 다큐멘터리 영화이자 팬들을 위한 헌정 영화다. 데뷔 시절부터 지금까지 한국 대중음악사와 현대사를 관통하는 그의 인생을 담았다.

남진은 “영화를 제안받았을 때 망설여졌다. 아직 마음은 젊어서 ‘내가 벌써 다큐까지 만들 때인가’ 싶었다”며 “돌이켜보니 60년이 지났고 이 분야에서 제일 오래 한 놈이 나더라. 세월이 많이 지나 영화에 담을 과거 자료들이 별로 없는 게 아쉬웠다”는 소회를 밝혔다.

남진은 ‘가슴 아프게’로 MBC 신인가수상을 받고 1971년부터 3년 연속 가수왕에 올랐다. 엘비스 프레슬리, 냇 킹 콜, 레이 찰스, 프랭크 시내트라 등 팝스타들을 보며 가수의 꿈을 키웠던 그는 남다른 감각으로 장르를 넘나드는 세련된 음악을 선보였다. 70여 편의 영화에서 주연배우로 활약하기도 했다. 1970년대 5만명 규모의 팬덤을 거느렸던 남진은 여러모로 한국 음악사 최초의 아이돌이었다.

해병대 입대 후 베트남 파병은 또 다른 파격이었다. 남진은 심지어 전쟁터에서 1년간 복무가 끝난 뒤 귀국하지 않고 1년을 연장했다. 그는 “지금 같으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텐데 그땐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며 껄껄 웃다가 “연예인으로서 남은 군 생활 1년을 한국에 있으면서 휴가도 나오고 그러는 것보다 대중이 볼 수 없는 곳에 있다가 등장하는 게 전역 후 활동을 재개했을 때 극적일 것 같았다. 어려움을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해명 아닌 해명을 했다.

남진은 1946년 목포일보 발행인 겸 제5대 국회의원을 지낸 아버지의 늦둥이 아들로 태어나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다. 남진은 “당시 목포에 포드 자동차를 가진 단 한 명의 민간인이 아버지였다. 가수를 하겠다고 했을 때 걱정이 많으셨는데 지금의 모습을 보신다면 자랑스러워하진 않더라도 서운해하시진 않을 것”이라며 “가수 활동을 할 때 어머니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어머니는 파병갔을 때도 미군 전투기를 통해 베트남까지 파김치를 보내주신 분”이라고 했다.

영화에서 “인생도, 인기도 파도같다”고 말했듯이 그는 긴 세월 동안 여러 번 위기를 겪었다. 군사정권 하의 가요계엔 금지곡도 많았다. ‘가슴 아프게’와 함께 발표한 ‘연애 0번지’는 제목의 의미가 의문스럽다는 이유로 어디서도 틀 수 없게 됐다. 정치권에서 퇴폐적이거나 왜색(倭色)이 있다고 판단하면 금지 처분이 내려졌다.

남진은 “어쩔 수 없는 시대였다. 정말 섭섭했는데 그 곡이 금지되는 바람에 ‘울려고 내가 왔나’가 대박이 났다”며 “‘인생이란 모르는 것이구나’ 깨달았다. 전두환 정권 당시엔 전라도 출신이라서 우회적으로 출연을 금지당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억울했던 그 시절 미국으로 잠시 떠났다 돌아오니 대중의 반응이 예전같지 않았다. 1980년대가 시작됐다. 시대는 흐르고, 유행은 바뀌었다. 인기는 물거품같은 것이었다. 더이상 파랗기만 한 청춘이 아닌 한 가정의 가장이 된 남진을 팬들은 떠나갔다.


그는 “수백 곡을 불렀어도 ‘가슴 아프게’, ‘님과 함께’ 처럼 가장 많이 사랑받은 노래들이 아무래도 소중하다. 무명 작곡가가 날 위해 2년 가까이 만들어서 빈 사무실에 놓고 간 ‘둥지’는 날 슬럼프에서 건져냈다”며 “미국에서 돌아왔을 때, 이름만 있고 인기는 없을 때 내게 운을 가져다준 노래다. 배우는 연기가 있어야 하고 가수는 노래가 있어야 한다는 것, 인연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다”고 돌이켰다.

최고의 전성기 때 라이벌이었던 나훈아가 은퇴 공연 소식을 최근 알렸다. 남진은 “그만의 이유가 있겠지만 훈아씨는 아직 노래를 잘하는데 떠나서 좀 이르지 않나 싶다. 난 지금은 (은퇴할 때가) 아니다”며 “다만 ‘노래가 안 돼서 떠난다’는 말을 듣기 전에 은퇴하고 싶다. 할 때까지 하고, 노래할 수 있을 때 사라질 것”이라고 했다.

남진의 얼굴엔 여전히 익살이 가득하고 목소리엔 힘이 넘친다. 오랫동안 노래하기 위해 몸도 마음도 끊임없이 관리한다. 술은 원래 잘 못했고 담배는 30여년 전에 아버지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가 묻힌 선산에서 맹세하고 끊었다.

그는 “대한민국에서 이 나이에 춤추고 다리 떠는 놈 봤느냐”며 “흥이 있지만 나이 먹어서 주책이라고 하니 그나마 자중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어 “국내 가요계에서 ‘최고의 꼰대’가 되다 보니 책임감이 느껴지고 부담스럽기도 하다. 어느 날 감성이 사라지고 흥이 사라질까봐 두렵다”는 걱정도 내비쳤다.

요즘 K팝의 인기를 보면 엄청난 격세지감을 느낀다. 그는 “당시엔 공연이라봐야 극장 쇼밖에 없었고 출연료는 10만~20만원이었다. 출연할 수 있는 가요 프로그램도 방송사마다 하나씩, 총 3개가 전부여서 그런 데 한 번 나가는 게 하늘의 별따기였다”며 “우리 때보다 다들 실력이 좋기도 하지만 이렇게 좋은 여건에서 노래하는 후배들이 부럽다. 난 팝을 했던 사람이고, 춤도 췄던 사람인데 이 시대에 태어났으면 어떻게 됐겠냐”고 너스레를 떨었다.

후배 가수들에겐 애정어린 충고를 남겼다. 남진은 “좋은 여건 때문에 오히려 인생이 안 좋게 흘러갈 수 있다. ‘나만 잘 돼야지’ 하는 마음보다 동료들과 서로 잘 이끌며 대중의 사랑을 받았으면 한다”며 “선배들이 ‘가수보다 사람이 먼저 돼야 한다’고 했던 말을 이젠 뼛속 깊이 안다. 인생이 중요한 것이고, 노래 열심히 하는 건 당연한 것”이라고 따끈한 일침을 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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